메뉴 건너뛰기

XEDITION

유머





일본의 아동 연쇄살인범으로 1980년대 말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 의 범인. 위 사진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왼편의 인물로 희대의 인간 말종 쓰레기, 천하의 개쌍놈이자 일본판 알버트 피쉬.[1]

Contents

1. 행적
2. 만행의 종말, 그러나 그 부작용
3. 그 외

1. 행적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미숙아였고 손에 기형이 있어서 손바닥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학창시절 이지메를 당했다. 또한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에 아버지하고도 사이가 안 좋았으며 오직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 뿐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시절 좋아하던 동급생에게 고백하였으나 손의 장애 때문에 차이고 말았다. 이때 어린 소녀가 그를 위로해 주었는데 이때부터 어린 소녀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손의 장애로 인한 이지메, 그에 따른 사회부적응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살의 소녀 콘노 마리(今野真理)를 납치하여 살해한다. 이때 그는 사후경직으로 굳어진 사체에 특정한 행위를 하였고 이를 비디오로 찍었다. 이러한 행위를 한 까닭에 대해 처음 간이감정 문진기록에서 그는 "아무래도 2차원보다는 3차원이 좋았다" 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1차 감정에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였고 최후 피고인 질문에서는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며 오락가락했다. 그는 사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벽장 안에 보관하고 나머지 부분은 도쿄도 이츠카이치쵸(현재 아키루노시)의 숲에 버렸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우시에서 7살 소학교 1학년 소녀 요시자와 마사미(吉沢正美)를 납치, 살해하였고 이번에는 곧바로 특정한 행위를 하였다. 동기에 대한 공술조서에선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 고 했다가 1차 감정에서는 역시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하였다.[2]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가와코에시에서 4살 소녀 난바 에리카(難波絵梨香)를 납치 및 살해하였다. 이후 시신을 숲에 버렸는데 12월 15일에 나체의 상태로 발견된다. 12월 20일에는 죽은 난바의 부모 집에 엽서가 도착했다. 엽서에는 "에리카, 추위, 기침, 목, 휴식, 죽음" 등 소녀의 살해 당시의 정황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잡지에서 잘라낸 활자로 적혀 있었다. 부모가 사체라도 찾아 다행이라고 말한 걸 TV에서 본 그는 다른 소녀들의 사체도 부모에게 보내려고 계획하나[3] 요시자와 마사미의 사체는 회수하지 못했다.

1989년 2월 6일 콘노 마리의 집에 골판지 상자가 배달됐는데 안에는 콘노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과 치아, 문서가 발견됐다. 문서에는 "마리의 뼈, 불태움, 감정, 증명" 이라고 쓰여있었다. 이 뼛조각과 치아는 산에 버렸던 콘노 마리의 시신을 회수한 다음 화장하고 남은 것이었다. 2월 10일에는 이마다 유코라는 가명으로 아사히신문 도쿄본사에 아이를 유산해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범행 성명을 보낸다. 그는 이러한 가짜 범행 성명을 11일 콘노 마리의 집에 3월 11일 요시자와 마사미의 집에 보내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했다.

1989년 6월 6일 도쿄도 고토구에서 5세의 소녀 노모토 아야코(野本綾子)를 납치, 살해했다. 이때 그는 소녀의 시신 일부분을 훼손하여 직접 먹기도 했다. 이쯤이면 이미 인간으로서의 길을 완벽하게 포기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11일 무참히 난도질 당한 노모토 아야코의 사체가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미야자키의 정신나간 범죄 행위는 마침내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또 다른 소녀를 성폭행하려고 하다가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공격당해 현행범으로 붙잡히면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이전에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를 자백한다. 그가 범행을 자백한 지 하루만인 8월 10일 마지막 희생자인 노모토 아야코의 머리가 발견되었으며 9월 2일 검사가 기소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미야자키 츠토무가 시신을 묻은 장소를 안내함에 따라 9월 6일 첫번째 희생자 콘노 마리의 손발이, 13일 요시자와 마사미의 사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조사 결과 그는 소녀를 살해할 때마다 집에 짚인형을 두고 방을 어둡게 한 후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양초를 여러 개 켜고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손을 위 아래로 휘저으며 죽은 할아버지에 대한 부활의식을 벌였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고인드립.

당초 범행 일체를 자백했던 미야자키는 공판이 시작되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인격의 경우 정신이상자이므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여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 벌인 점이 고려되어 그가 진짜 다중인격인지의 여부가 재판에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됐다. 때문에 1990년 3월 도쿄 지방법원에서 시작된 심리는 판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중 절반은 두 차례에 걸친 미야자키의 정신 감정에 소모됐다.

1차 감정결과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즉, 인격장애)' 으로 정신장애는 아니며 완전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으나 2차 감정의 경우 '다중인격' 과 '통합실조증' 으로 책임 능력이 일부 부정되었다. 이 경우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어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했고 1997년 4월 4건의 아동 유괴살인 혐의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측은 재감정을 청구하지만 기각되었다. 10회에 걸친 피고인 질문을 실시한 끝에 2001년 6월 도쿄 고등법원은 미야자키의 공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 2006년 최고재판소 역시 사형 판결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2008년 6월 17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4년에는 츠토무의 아버지가 그의 죄를 책임지겠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전에도 일본에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살인 사건은 존재하고 있었고 이런 사건으로 사형당하는 자들도 드물지 않았지만 이 범죄자가 부각된 가장 큰 이유는 살해된 어린이만 무려 네 명인 데다가 범행 동기가 돈이나 성범죄 등이 아닌 네크로필리아라는 특이한 점. 바로 언론에다 자신을 잡아보라는 도전장을 보내고 피해자의 부모에게 딸의 신체 일부를 보내는 제정신이 아닌 짓을 했기 때문. 결국 일본 경찰은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에 이례적으로 프로파일링 수사기법까지 동원하는 공을 보였다(프로파일링이 일본에서 최초로 쓰인 사건이다).

특이점으로 수감생활 중 잡지「창」편집부와 주고받은 서신을 묶어 다음 두 권의 저서를 냈다.

* 꿈 속 - 연속 유녀 살해 사건 피고의 고백 -1998년 12월 창출판(ISBN 9784924718302) 
* 꿈 속, 지금도 - 연속 유녀 살해 사건 전 피고의 고백 - 2006년 2월 창출판(ISBN 9784924718722)

2. 만행의 종말, 그러나 그 부작용 

결국 검거됨과 동시에 전국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하고 그의 집에서는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으며 그 안에 높은 수위의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 몇 편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자 언론이 대대적으로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등식을 사용해서 까댔다.

예를 들어 한 여성 아나운서가 코믹마켓 입장대기줄을 향해 "여기 수많은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 라고 까는 내용을 방송했다던가 하는 도시전설까지 퍼져있을 정도.[4]

이 과정에서 미야자키 츠토무의 신상이 유포되어 그의 두 여동생은 직장을 그만두거나 파혼했으며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로부터 편지와 전화로 폭언에 시달려야 했다.[5] 또 미야자키와 같은 이름이나 닮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전국의 오덕들과 독신 남성들이 괴물 취급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미야자키 츠토무의 아버지가 자살을 해버리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큰 후폭풍이 불었다. 한국에서도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흉악범죄인이 언론에 뜨면 그 범죄인과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개명을 하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미 인생 다 때려친 중범법자들이 범죄를 안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대중의 복수심만 충족시켰을 뿐 별 효과는 없었다.

미야자키 츠토무 이전에는 일본의 오타쿠란 존재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이긴 했지만 세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쓰던 존재라고 할까. 그런 존재가 언론에 한 번도 소개가 안 되다가 이 사건 덕분에 가장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 충격이 오죽할까. 결국 일본의 오타쿠들이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기에는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실은 이건 모두 다 언론의 설레발이 부른 비극이며 당시 기자의 고백에 따르면 미야자키 츠토무는 단순한 오타쿠이자 네크로필리아로서 5000여편의 비디오 중 문제가 될만한 건 40편 정도로 전체의 1%도 안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나 도카벤 같은 장편 야구 애니메이션의 TV 녹화 비디오였다고. 정신감정 결과로도 그가 수집한 작품들이 미야자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소아성애자도 아니었다[6]. 결국 사회적 멸시에 그의 뒤틀린 인간성이 더해져 사람 자체가 심각하게 비뚤어졌기 때문에 아동 연쇄살인이라는 사상 초유의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지 그가 수집한 작품들의 영향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사회적인 멸시 등으로 인하여 비뚤어진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는 하나 인간이기를 완전히 포기할 만큼 죄질이 극악한 데다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반성을 한 적이 없는 인간이니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을 일은 영원히 없을 듯하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