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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경남 의령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

헹헹ㅋ 2019.03.24 18:06 조회 수 : 7

http://www.ilwar.com/horror/63834



악마가 지배한 밤, 의령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

 

그 밤은… 악마의 밤이었다. 더 이상 “인간의 탈을 쓰지 않기로 작심한 악마가 피와 공포로 마을을 도륙한 밤”이었다.

하루밤새 무려 56명을, 처형하듯 떼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을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1982년 4월26일 밤의 일이다.

경남 의령의 산골마을 궁유면에는 그날 봄비가 궁상맞게 흩뿌리고 있었다.

밤 9시 반경부터 이 희대의 살인극은 시작됐다.

“마을을 지키고 주민을 보살펴야 할” 지서 순경이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돌변했다.

의령경찰서 궁유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27).

그는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4개 산골마을을 돌며 수류탄을 던지고 카빈 소총을 난사해

무려 90여명을 살상한 뒤 자신도 자폭해 죽었다.

 

어처구니없는 참변의 발단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 순경은 이날 “내연의 처 전씨(25)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술을 마셨다.

오후 6시부터 지서 야간근무자로 지정된 그가 야근에 대비해 “집에서 낮잠을 잘 때 파리가 날아와 가슴께에 붙었다.

전씨가 그걸 잡겠다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고 이에 우순경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일이 발단이 돼 둘은 그간의 감정까지 폭발시키며 심하게 다퉜다.

끝내 화를 못 참고 오후 4시쯤 집을 뛰쳐나간 우 순경은 근처 가게에 들어가 술을 퍼마셨다.

저녁 7시 반. 우 순경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더니 다짜고짜 세게 처의 뺨을 때려 코피를 쏟게 하더니

말리던 친척까지 폭행하며 집안 가구를 내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웃사람들이 그걸 보고 “어떻게 저런 망나니와 함께 사느냐”, “저런 인간이 경찰이 맞느냐”며 처를 동정하자

또 집을 나와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지서로 돌아갔다.

근무시간인데도 지서에 앉아 근무한 게 아니라 술집과 집, 지서를 들락거리며 화풀이를 하러다닌 셈이었다.

그러던 밤 9시 반 경. 내연의 처를 폭행할 때 말리다 함께 뺨을 맞은 친척아들이 지서로 우를 찾아왔다.

그리고 “경찰이면 다냐? 왜 아무나 때리느냐?”고 따졌다.

이에 우는 시쳇말로 “꼭지가 돌았던”것 같다. 느닷없이 “그래, 다 죽인다!”고 소리치며

미친 듯 지서와 예비군무기고로 달려가 카빈 소총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부터 조용한 산골마을은 끔찍한 ‘인간 사냥터’로 변해버렸다.

그는 마침 지서 앞을 지나던 20대 행인을 조준 사살하더니 구멍가게에 수류탄 2발을 던졌다.

다행히 수류탄은 불발됐다. 그러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우체국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여기서 당직근무 중이던 교환양 2명을 카빈총을 난사해 살해했다.

또 숙직실에서 자고 있던 집배원에게까지 총을 쏘았다.

그가 우체국을 사실상 첫 타깃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통신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산골마을엔 수동식 전화기 밖에 없어 우체국 교환원이 전화선을 연결해줘야만 전화통화가 가능했다.

당연히 “이곳을 마비시키면 마을 내부는 물론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깜깜 먹통이 되는” 거였다.

 

처 일가족을 다 죽였다고 생각한 우는 다시 압곡리 남쪽으로 600m 떨어진 운계리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한 중학생을 만나 함께 운계리에 도착한 그는 “장터입구 가게에서 콜라 1병을 사 마시고는 바로 동행한 학생을 사살”했다.

순간적인 총질에 놀라 가게주인 가족이 허둥대자 이번에는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겼다.

마을입구 쪽에서 ‘타당 탕탕’ 총소리가 나자 안쪽 마을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어 불을 켜고”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와 기웃거렸다.

이렇게 불을 켠 집은 모두 악마의 손길에 소리 한번 못 지르고 변을 당했다.

우는 장터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며 “간첩이 나왔다. 다 나와 보시요!”라고 소리치거나 “이 더러운 세상. 싹 다 죽일 거다.

순경 못해먹겠다”는 등 혼잣말을 웅얼웅얼 지껄이며 총질을 했다.

 어떤 때는 씩 웃으면서 총을 겨누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도륙하는 악마의 광란에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갔다.

 

운계리에서만 18명을 사살한 우는 산길로 2km 떨어진 평촌리에 자정 무렵 도착했다.

그는 마을사람이 많이 모여 있던 문천군 씨의 초상집에 들어와 조위금 3천원까지 내고 술상을 받았다.

 

대학살은 바로 그 순간 또 이어졌다.

술상 옆의 한 주민이 카빈을 툭 치며 농담처럼 “실탄도 없는 빈 총을 뭐 하러 가지고 다니나”고 하자 우는 그를 노려보더니 총을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농을 던진 사람과 그 옆의 이장을 쏴 죽였다.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우는 콩 볶듯 총을 갈겼다.

겨우 정신 차린 사람들이 후다닥 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순경이 사람을 쏜다!”며 도망치는 뒤를 향해서도 총을 쏘았다.

일부 산속으로 도망간 엎드린 사람들은 초상집에서 연속해서 타당타당 총 쏘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저래선 안 되는데, 총을 뺏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오금이 저려 차마 일어서지를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우는 이 초상집 근처에서만 모두 24명을 죽였다.

 

 

새벽 2~3시경, 우는 산속에 숨어있다 다시 평촌리로 내려왔다.

평소 알던 서모 씨 술집에 들어가 가족 4명을 인질로 잡고 있던 그는 동이 트기 전에 수류탄 2발을 터트려 인질들과 함께 폭사했다.

결국 “아무도 그가 죽기 전까지 악마적 발광을 막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그가 자폭하기 직전까지도 서씨 가족들에게

무장공비가 나와 작전 중”이라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꾸며대 인질로 잡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4월27일 오전, 사건이 처음 보도되자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찰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을 100명 가까이 죽였다는(처음에는 62명부터 73명까지 사망했다는 등 피해자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얘기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속보가 속속 나오면서 우가 청와대 경비대에 근무하다 의령서 궁유지서로 좌천돼간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측은 그가 “청와대에 근무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언론에 ‘협조’를 요청했고,

당시 신문들은 “그가 서울의 특수근무지에서 일했다”고 얼버무려 보도해야 했다.

그뿐인가,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조차 5월 초부터는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생기를 되찾는 비극의 마을”, “경찰 불신, 있을 수 없다” 등 ‘긍정적’ 후속기사만 간헐적으로 나왔다.

그나마 5월 둘째 토요일인 8일 이후에는 신문지면에서 아예 기사가 사라졌다.

대신 정부는 피해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을을 정비하고 사망 부상자들에 대한 배상도 군말이 안 나게 신속하고 풍족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국민은 알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압화가 이런 엄청난 재앙도 몰고 왔다는 것을.

 

우순경 사건 직후 발행된 <경향신문> 1982년 4월 27일자 1면. 가운데 범인 우범곤 순경(작은 사각형 안)의 얼굴이 보인다.

경향신문 사회면

 

 

동이일보 1면과 사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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