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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만화

나는 자취방에 숨어든 좀도둑처럼 방을 뒤지기 시작했어. 아니 시발 간지가 안나니까 압수수색이라고 해두자. 일단 문을 걸어잠그고 쓰지 않는 밑에 문고리의 잠금장치까지 걸었어. 이러고 있을때 혜진이가 돌아오면 큰 낭패니까 말이야. 그리고는 옷장을 열어 혜진이의 옷이 어떤건지, 내가 기억하는 팬티는 없는지 빠른 조사를 했지만 실패했어. 여대생씩이나 된 주제에 고딩때 입던 옷들을 그대로 입을리가 없지. 일단 책상은 하나였어. 둘이서 쓰는 방이지만 둘이 함께 방에서 공부하는 일 따위는 좀처럼 없을테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지. 책상 위에는 사진 같은 건 없었어. 전용책상이 아닌 모양이더라고.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포스트잇이며 칼이며 자잘한 학용품들이 나왔고, 단서 따위는 없었어. 하아 시발.. 룸메이트년의 얼굴이 궁금한데.. 답답해하며 책상 아래를 보니 크고 작은 박스들이 있는거야. 그 왜 여자들 방에 보면 끈 손잡이 달린 직물 소재 박스 같은거 있잖아.


과감하게 맨 앞에 있는 박스를 열어보니 이건 판도라의 상자가 따로 없었지. 편지며, 사진이며 각종 희소식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더라. 혜진이 박스가 아니었으니까 그 룸메꺼지 뭐. 둘은 개인적인 물건들은 이렇게 나눠서 박스에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었어. 사..사진을 보자. 그때 당시에는 스티커 사진을 쳐 찍어서 어디다 붙여놓고 보관하고 하는게 유행이었어. 존나 코도 안나오게 넘치는 빛으로 찍은 스티커사진으로는 와꾸를 짐작할 수 없었지. 더 뒤져보니 쓰지 않는 신분증, 액자에 넣어둔 사진 같은게 나왔어. 무슨 부모님과 함께 찍은 고등학교 졸업사진도 있더라고. 흠..이 부모님들은 지금 어느 불한당 같은 놈이 이 사진을 보며 흉측헌 짓을 하려고 하는 걸 알고 있을까 잠깐 생각해봤어. 뭐 역시 상관없는 일인거지. 룸메년 얼굴은 걍 ㅍㅌㅊ였어. 하지만 교복치마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가 인상적이었어. 이러면 뭐 망설일게 없어진거지.


다시 옷장 서랍으로 가서 빤스를 고르기 시작했어. 어느게 룸메년거고 어느게 혜진이껀지 구분이 된다면 더 좋았겠지. 구체적인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깐..하지만 뭐 지금 상태도 나쁘진 않은거잖아? 나는 속옷가게에 들른 노신사처럼 곱게 정리된 빤스를 하나 하나 고르기 시작했어. 이런 짓을 할때는 원형보존이 제일 중요한거야. 순서가 존나 크게 바뀐다거나 접어놓은 모양이 이상해진다거나 하면 괜한 오해를 사게 되니까. 난 마치 공룡화석을 붓질해가며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신중하게 하나의 빤스를 집어내 천천히 펴보았어. 나의 팬티 취향은 대단히 보수적이라서 아무 무늬도 없는 얇은 면소재 하얀 빤스를 아주 후하게 쳐주는 편이야. 그 하얀 빤스에는 아쉽게도 앞쪽에 무슨 자그마한 리본같은게 달려있었지만 뭐 전체적인 재질이나 사이즈면에서 흡족했지. 내 직감상 아마도 그 룸메꺼였지 싶어. 접힌 모양을 기억하고는 완전히 펴서 감상한 후 뒤집어 ㅂㅈ가 접촉하는 부분을 면밀하게 조사했어. 약간의 변색으로 보아 꾸준히 입어온 팬티로 추정됐지.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뭐..아쉽게도 섬유유연제 향밖에는 느낄 수 없었어. 하지만 내 바짓춤을 부풀어오르게 만들기엔 충분했어. 


그렇게 난 두번째 네번째 서랍을 모두 정복한 뒤 극도의 허탈감에 빠졌어. 만약 새팬티가 아니라 입던 팬티였다면 딸이라도 한번 잡았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냥 불기둥만 존나 부풀린 다음에 사그라든거지. 군대 휴가 나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도 싶고 뭐 그랬어. 혜진이는 올 생각을 안하더라고..난 군인이라 전화기도 없고 혜진이한테 전화를 해볼 수도 없잖아. 집 비워두고 나가서 공중전화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야. 젠장.. 존나 티비도 없고, 빨아놓은 빤스만 잔뜩 있는 여대생들의 방에서 뭐 할 일이 있겠어. 난 다시 책상 아래켠 박스들로 접근했어. 다른 박스들을 뒤져보니 편지가 빼곡하게 꽂혀있는 게 있었어. 하나를 집어들었지.


'To 혜진, From 현우' ...시발 ㅋㅋㅋㅋ 존나 초라해지는 심정이었지만 또 안 읽어볼 수가 있나. 조심스레 편지지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어. 그 속에는 내가 거의 3년을 물고빨고 사랑하던 년이랑, 나랑 제일 안 친한 ㅈ 같은 새끼가 주고 받은 사랑의 밀어들이 가득 차있었어. 아 이렇게 만났구나. 이렇게 사랑을 하게 됐구나. 현우 이새끼는 내가 혜진이의 첫사랑이었다는 거에 대해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갖고 혜진이를 조금 괴롭혔구나..따위의 정보들을 알게 됐어.


가슴이 조금 아릿아릿하더라. 다시 화장실로 가 자라처럼 대가리를 내밀고 담배 한 대를 더 태워죽인 뒤에 마저 편지들을 읽었어. 다 읽고 나니 어쩐지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어. 첫사랑이라는 게 특별한게 아니라, 그냥 처음 한 사랑인거..그거뿐이구나.. 고딩 때 치기로 운명이라고 믿고 울고 불고 했던 상대는 꼭 내가 아니라도 또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구나.. 어쩌면 내가 보여주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서 발견하고 또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어. 다시 편지들을 다 정리해서 넣은 뒤에 손깍지를 베개 삼아 벌렁 드러누웠어. 잠이라도 쳐잘까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어.


한참을 그렇게 옛날 생각, 엄마 아빠 생각,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여친 생각 따위를 하며 누워있었지.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지는 것 같고 내 자신은 점점 한심해지고 있는데 달칵달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어. 혜진이가 온 모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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