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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만화

꿈에 그리던 년 먹고 체한 썰 9

참치는C 2024.03.26 19:55 조회 수 : 533

추석 잘 보내셨나들. 휴가다 명절이다 해서 글을 꾸준히 작성할 수 없었음에 미안해. 몇명이나 읽는지는 모르지만 시작한 글이니 끝은 내야지. 일단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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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했으면 오빠가 갔을거야?"




라니..시발 이딴 말이 어딨어. 하지만 난 빡침을 누르고 최대한 수정이의 편에 서서 생각해보려했어. 수정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자야. 물론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 기준에서 수정이는 충분히 superficial한 여자였어. 뭐 그런 걸 알고도 사귀고 있을만큼 좋은 점이 있으니 그거야 그렇다고 쳐.




그러니 수정이는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나를 호텔에 모여 술도 한병 까고 넉넉하게 놀 수 있는 친구들의 남친들과 비교하기 싫었을거야. 그러면 나랑 헤어지고 직장인 남친을 만나든지, 나랑 만날거면 지금의 내 처지를 이해하고 기다리든지 따위의 생각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그냥 참았어.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얘기를 안했다면 들키지 말았어야 했고, 이왕에 들켰다면 사과했어야 했어. 이런 식으로 한쪽에게 비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건 최악이니까. 하지만 수정이는 당당했어.




"얘기했어도 안 갔겠지"




"그래서 얘기 안 한거야"




"그럼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어떤데? 내가 직장인이고, 니가 대학생이라 내가 커플 동반모임을 그냥 혼자 나갔다면?"




"난 나갔을거야"




"내가 얘길 안하는데 무슨 수로 알고 나가"




"얘기 안할리가 없지"




이쯤 되니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어. 얘가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있기에 이딴 오만한 말을 지껄일 수 있는건지. 난 극도로 빡치면 뇌가 셧다운돼. 현기증이 몰려왔어. 더 이상 얘기해봤자 의견이 좁혀질 것 같지도 않았고, 관계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기에 난 그냥 돌아서서 집에 와버렸어.




며칠이 지나고 수정이는 미안했는지 집 앞으로 찾아와 사과를 했어. 난 여전히 빡쳐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자취방을 찾은 수정이 여체의 향기가 그걸 누그러뜨렸어. 또 차렷자세로 섹스를 하고, 난 풀어져버렸지. 그리고는 우리의 문제가 뭘까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어. 수정이가 제시하는 문제의 근원은 간단했어.




'내가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것'




과연 그러한가 나는 한 팔은 수정이 팔베개로 내주고, 한 손은 내 이마를 긁으며 골똘히 생각했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여친이 재촉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뭐 할 수 있었어. 고급스런 데이트를 즐기는 것, 과외를 뛰고 돈을 아낀다면 할 수 있었어. 아르바이트, 인턴 등 돈을 벌면서 시간을 알차게 채우는 것. 물론 할 수 있었지. 3가지 다 할 수 있었던 일이야. 셋중 하나나 둘정도만 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수정이는 저 모든 걸 동시에 다 하라고 얘기하고 있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다른 커플들에게 꿀리지 않는 고급스런 데이트를 하는 것. 기분 좋은 섹스의 여운이 가시자 마자 이런 생각의 결론이 나왔고 난 다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




"수정아"




"응"




"나 아직 학생이잖아"




"응 근데?"




"니 친구들 남친들은 거의 다 직장인이라면서"




"응 맞어"




"그럼 내가 그 수준 맞추는게 힘들다는거 너도 알지 않아?"




"그 오빠들은 대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했어"




"걔네들 중에 집 망해서 이런 허름한 자취방에서 사는 놈들도 있고?"




"그건..모르지"




"우리가 학생들 데이트처럼 그냥 백반집에서 밥 먹고, 산책하면서 데이트하고, 모텔 안가고 내 방에서 자고 그러면 난 돈을 아낄 수 있어. 그러면 난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고, 그 시간에 공부할 수 있겠지. 그러면 난 니가 그렇게 원하는 취직도 더 빨리 할 수 있을거야."




"내가 되게 나쁜 년인 것처럼 들린다?"




"그런 게 아니잖아. 내 입장을 조금만 더 이해하면 되잖아"




"진짜 사랑한다면 왜 못해? 열심히 살면 다 할 수 있는걸. 오빠가 정성이 부족하니까 그런거야"




이 시발련이..니는 그리 열심히 살아서 지금 동네 Y영어교실 선생이나 처 하고 있냐? 라는 고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어. 그런데 팔베개를 내준채 누워서 고함을 지르려니 어색하더라. 그냥 팔을 빼고 일어나 앉았어.




"여튼 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 사이클이 있고, 그걸 니가 억지로 돌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난 뭐야?"




"뭐긴. 넌 니 인생 주인이지. 난 내 인생 주인이고"




"나 갈래"




수정이는 옷을 챙겨 입더니 서둘러 나가버렸어. 또 자취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지만 기분이 그렇게 더럽진 않았어. 담배를 한대 물고 엉켜버린 마음의 실타래를 하나 둘씩 풀려고 시도했어. 파도처럼 빡침이 밀려오고 또 그게 밀려가면 마음이 허전해졌어. 그렇게 또 연락 없이 냉전으로 며칠이 지나고, 난 문자 하나를 받았어.




"한국 왔다며?"




내가 보라카이에서 수정이에게 눈이 멀어 메일로 차버리고 답장도 못보내게 계정탈퇴를 해버린 여자.. 내 조강지처 같은 여자 연지였어. 조금 강한 성격이긴 했지만 내 모든 걸 다 받아주고, 나때문에 직장도 서울로 옮기고, 동거할 동안 용돈까지 주던 여자였지. 그런데 난 그런 애를 차버리고 지금 수정이에게 이런 꼬라지를 당하고 있는거야. 허허 웃음이 터져나왔고 갑자기 연지가 너무 보고싶어졌어.




"응. 잘 지냈지?"




"한번 봐야지"




연지는 아직도 내 학교앞에 살고 있었어. 애틋한 마음, 미안한 마음 등을 안고 후문 횡단보도 앞으로 나가니 연지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으로 서있었어. 마귀같이 느껴지는 수정이보다 훨씬 예뻐보였던 건 왜일까..내가 얘를 왜 찼을까..극심한 후회가 밀려왔어.




"많이 어른스러워졌네. 잘 지냈어?"




"그건 됐고. 하비에. 나한테 잘못했지?"




"응..그건 내가.."




"그럼 한대만 맞자"




연지는 웃는 얼굴로 나를 한대 때리겠다고 말했어. 내가 연지에게 했던 잘못과 양아치 짓은 셀 수도 없이 많았기에, 기꺼이 맞을 의향이 있었어. 난 드라마에서처럼 따귀나 한대 올려붙이겠거니 생각하고 왼뺨을 내줬어.




하지만 내 왼쪽 시야 아랫편에서는 꽉쥔 주먹이 훅과 어퍼컷의 중간 각도 쯤으로 빠르게 북상하는게 포착됐지. 피하기엔 이미 늦었어. 퍽!!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어떤 주먹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주저앉을뻔 했어. 남자들끼리 주먹질할때야 긴장으로 아드레날린이 나오니 그닥 아픈 건 모르지만 이런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턱주가리를 강타당하니 정말 눈에 별이 보이면서 아찔해졌어.




입안에서 찝찔한 맛이 났어. 내 송곳니에 입술이 걸려 찢어진거야. 제기랄.. 옆 가로수에 침을 뱉았어. 피콜로가 알을 뱉는 것처럼 피가 동그란 모양으로 뭉쳐져 떨어졌어. 아 이건 너무 아프다.. 너무 너무 아프다..




"이리 따라와 더 맞아야 돼 넌"




연지는 내 소매를 잡아끌고 뒷골목으로 들어가려 했어. 대로변에서 개망신이지. 하지만 그걸 생각할 틈도 없이 미친듯한 통증이 입가를 쑤셔댔어. 




"잠깐만 잠깐만.."




"왜 아파? 난 얼마나 아팠을거 같은데?"




"미안해.."




"그러니까 더 맞자 이리와"




"아니야 더는 못맞겠다. 다 맞은거 같다"




다 맞은거 같다니..이런 시발 찌질한 멘트가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어. 지금 생각해도 이불킥을 할 정도로 쪽팔려. 하지만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미안하다 연지야. 미안하다."




"왜? 아프냐? 지 몸 아픈 건 아냐?"




"갈게. 미안하다"




"쓰레기 같은 새끼"




난 도망치듯 뒤돌아 집으로 돌아왔어. 입안을 씻어내고 거울을 봤어. 하..시발 내가 지금 뭐하면서 살고 있는 건가. 기분이 너무 좆같더라. 담배를 피우려고 해도 윗입술 안쪽이 찢어진 탓에 빨아당길 수도 없었어. 밥을 먹을때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병신처럼 씹어야했고 한 2주 동안 고생을 한 것 같아. 수정이는 삐진 것 반, 바쁜 것 반 해서 연락도 잘 안했기에 내가 이렇게 다친 것도 몰랐어. 그리고 내 입술이 다 나아갈 때쯤 수정이 생일이 다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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