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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만화

그러니까 이게 언제였냐 하면, 내가 대학 다닐 때였다.
나는 졸업반이었고, 그냥저냥 정도의 대기업 지방 브랜치에 취직이 확정된 상태로
대학생활 막바지에 뭘 하면 즐거운 추억이 될까를 고민하던 시점.

평소 친하게 지내던 1년 후배 여자애(이하 다정)가 있었다.
술잔도 자주 나누고, 내가 기타를 치다가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곤 하던
가끔 많이 취해서는 나중에 뭐 해먹고 사냐고 푸념 삼아 넋두리를 내뱉곤 하던
여자애들 중에선 가장 가깝게 지내던 아이였다.
나를 잘 따르는 아이였고, 내가 생각해도 참 매력적인 아이였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날 마음이 허해서 혼자 자취방에서 술을 한잔 했을 정도로.
깨졌다는 말을 듣고 또한 기뻐하며 하루 종일 미소가 떠나지 않았을 정도로.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그 이상 가까워지는 것을 피했는데
CC란 것이 잘못될 경우 얼마나 개같은 경우가 되는지를 미리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졸업을 약 보름 앞둔 날, 평소처럼 과방 소파에 앉아 기타를 뜯어대고 있었는데
다정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햇볕 좋은 날에 기타 끌어안고 청승을 부리고 있는 나를 보며 한껏 깔깔대며 놀리는 모습도
이제 며칠 뒤면 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어째 마주 놀릴 기운이 없어졌다.
별 대꾸 없이 슬쩍 웃으며 Am 코드 아르페지오를 튕기고 있자니
이 녀석이 옆에 와 풀썩 주저앉는다.

잠시 둘 다 별 말 없이 앉아서
다정이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고
나는 한참 기타를 괴롭히다가 겁나 진지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크라잉넛의 '비둘기'를 불렀다.
다정이는 웃음이 빵 터져서 한참을 깔깔대더니
아 이젠 이런 개그도 못듣겠네, 아쉬워서 어쩌나, 등등의 말을 지껄였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참 많이 아쉬워 하던 차에, 불쑥 말을 꺼냈다.
오늘 술 한잔 하자고.
별로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다정이는 승낙을 했고, 강의 다 끝난 오후 6시에
흔히 약속장소로 자주 쓰이는 학교 앞의 거리의 약국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시간 쯤 뒤, 나는 약속시간보다 15분쯤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 약국 앞에 도착했다.
삐친 표정을 하고 있는 다정이에게 사정이 있어서 늦었다고 변명을 해 보았지만
무슨 사정이냐고 집요하게 캐묻는 통에 거짓말도 꾸며내지 못한 채
레이드가 헬팟이 걸려서 늦었다고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토라진 다정이를 어르고 달래서
자주 가던 조용하고 분위기 옛날스러운 술집으로 데려갔다.
여자애랑 단둘이서 여기 온 건 처음이라는 말에
다정이는 조금 미심쩍은 눈치다.

"예전에 영주 언니(예전 CC였던)랑 같이 온 적도 없어요?"
"걔는 옛날노래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알지도 못함ㅋ"

가게 분위기상 김광석, 이문세, 둘다섯, 좀 더 옛날로 가면 김민기까지 해서
우리 세대들에겐 흔히 '옛날 노래'라 불리는 음악이 자주 나오는 곳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영향 탓에 그런 노래들에 매우 익숙해 있고
다정이도 그 나이대의 여자애 답지 않게 옛날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음악 취향이 참 비슷한 덕에 이야기가 잘 통하긴 했었다.

가게가 좀 외진 곳에 있는 탓에 저녁시간이 좀 흘러도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생맥주 하나씩 시켜 놓고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카운터로 가서 사장님한테 통기타를 빌렸다.
평소에 혼자 와서 하도 술을 퍼마시다 보니 안면이 트여서 이런 부탁도 쉽게 들어 주신다.
게다가 내가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음악을 아예 꺼 주시는 스타급 센스.
기타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다정이는 작게 환호하면서 박수를 쳤다.

둘다섯의 긴머리 소녀,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등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불렀다.
다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역시 은근한 목소리로 따라 노래했는데
이게 별로 많이 마신 술도 아닌데
이상하게 다정이가 너무 예뻐 보였다.
기타를 치는 내 손을 보다가 내 눈을 보다가 하면서 음악에 맞춰 흔들흔들 하는 몸짓이
묘하게도 섹시해 보였다.

아, 확실히 그때 취하긴 취했었나보다. 다짜고짜로
"우리 소맥으로 섞어 마셔볼까?"
같은 소리를 지껄였던 걸 보면.
다정이는 주저없이 콜을 외쳤고....

아니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진짜 얘를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그런 불순한 의도로 소맥을 제안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얘랑 나랑 둘 다 술에 떡이 되서 과방에서 밤을 보낸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렇게 일배일배부일배 하면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자니
슬슬 한두 테이블씩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변에 폐를 끼칠 수도 없고 해서 사장님께 기타를 반납하고 감사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아, 이 녀석이 테이블을 건너와 내 옆자리에 멀뚱히 앉아 있다(1테이블 4인석).
얘가 화장실 갔다 오다가 자리를 착각했나 싶어
원래 다정이가 앉던 자리에 가서 앉은 후 잔과 수저를 서로 바꿔 놓고 고개를 들어 보니
얘 얼굴이 장난 아니게 험악하다.

시발 내가 뭘 잘못했지 싶어서 부단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다정이가 다짜고짜 자기 잔을 꿀꺽꿀꺽 들이킨다.
상황이 험악하고 급박한 와중에도 여자애가 그렇게 술을 막 들이키는 걸 보니
쎼....쎾씨하다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내가 발정남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남자란 다 그런건지ㅋ

거하게 잔을 비우고 난 다정이는 한참 말이 없다.
난 죄라도 지은 양 묵묵히 내 잔을 찔끔찔끔 마시고 있는데
다정이가 대뜸 말을 툭 던진다.

"오빠, 이제 곧 졸업이죠?"
"....어, 그렇지."
"취직도 됐고, 대학생활 하면서 CC도 해봤고, 뭐 별로 아쉬울 것도 없겠네요?"

사실 이때 그냥 'ㅎㅎ 그렇지 뭐' 하면서 대강 넘길 수도 있었는데, 술기운이었는지 아니면 뭐였는지
선뜻 뭔가 대답이 나오지를 않고 머뭇거렸다.
다정이는 뭔가 싶었는지 막 물고 들어왔다.

"왜? 왜? 뭐 아쉬움 남는 거 있어요?"
"야 ㅎㅎ....사람이 아쉬움 없이 사는게 가능키나 하냐."
"뭐 어떤 게 아쉬워요? 졸업하기 전에 빨리 할 수 있는거면 해요! 그래야 아쉬움 안 남지."

나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술잔만 비웠고, 다정이는 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시발 될대로 되라 ㅋㅋ 하는 심정에 그냥 되는대로 대답했다.

"내 이상형인 여자랑 못 사귀고 대학생활 끝내는게, 그게 제일 아쉽다."
"이상형? 어떤 타입?"
"키 좀 작고, 좀 왜소해 보인다 싶을 정도로 아담하고, 귀여운 애."

내 대답은 철저히 전 CC였던, 키도 늘씬하게 크고, 테니스 귀공녀 답게 탄탄했고, 눈매가 매서웠던 영주의 반대 타입이었다.

사실 이때의 내가 했던 이 대답은, 좀 귀찮다 싶었던 탓에 되는대로 전 여친의 반대되는 특성만 주워섬겼던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다정이의 눈빛이 좀 묘해졌다.
굳이 표현하자면, 갑작스레 좀 열의가 서린 눈빛이랄까.

입을 열듯 말듯 하던 다정이가 툭 터지듯 말을 뱉었다.
"오빠가 말한 타입이랑 나랑 되게 비슷한데, 왜 나랑 사귀자는 말은 안했어요?"

순간적으로 콧방귀가 펑 터질 뻔 했지만, 그건 참 실례되는 행동이라 간신히 참았다.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던 직전,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갑자기 발휘되는 냉정한 시각에 따라 다정이를 관찰했다.

확실히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니긴 하다.
155cm 가량의 작은 신장
짧으면 옆으로 굵어지는 통상 한국여성들과는 하등 관계 없는 가녀린 체구
귀엽....지 뭐. 저 정도면. 아니, 예쁜 편이지.

관찰을 끝내고 나니, 타이밍상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라고 일갈하기에는 좀 늦어버렸다.
투수의 변화구에 속은 타자의 심정을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뭐라 말을 하기는 해야 되는데, 고작 뱉은 소리가 이거였다는 점은 아직까지도 쪽팔림을 금할 수 없다.

"너 뭐 입학하고 금방 남친 사귀더만 ㅎㅎ"

다정이는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멍청할 수 있지' 라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 인간이랑 딱 두 달 만나고 헤어졌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냥 혼자예요. 오빠가 영주 언니랑 헤어진 거 보고 한 달 뒤에 헤어졌어요."


와 시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좀 멍청하긴 하지만 저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다.
나는 다정이가 한 말의 의미에 조금은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한 상태로 술잔만 바라봤다.
다정이는 내 잔을 다시 소맥으로 채워 주었다(야 이 녀석아, 그런데 소주랑 맥주 비율이 반반이잖아).

"오빠는 평소에 절대 모험 안하죠? 안전한 수만 두고?"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그래서 지금도 무슨 말 하면 어떻게 되나, 덤터기 쓸까, 머리 막 굴리면서 계산 막 하고 있죠?"

시발 아까부터 왜 이렇게 된 거지 ㅎㅎ....

"이대로 놔두면 밤이 새거나 내가 답답해 죽거나 할거같으니 내가 그냥 말할래요. 나 오빠 좋아해요. 입학할 때부터."





나는 다정이의 고백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시간 늦었으니 이제 가야지' 라는 개쓰레기같은 말을 끝으로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섰다.

오른쪽 앞에서 반걸음 쯤 앞서 약간 취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다정이의 뒷모습을 흘끔흘끔 보면서 걷자니
내가 아주 그냥 개병신이 된 느낌이다.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다정이가 밝힌 진심에 적절한 답도 못 하고
손도 못 쓴 채 대마를 통째로 잃게 생긴 바둑 기사가 된 느낌이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서 얘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지방으로 내려가면 되나....
스스로에게 떠올린 의문에 답을 못 하고 있던 찰나,

"오빠, 아이스크림 사줘요."

하면서 다정이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는 이가 시려서 평소 아이스크림을 거의 먹지 않지만 뭐
지금 다정이가 원하는 건 그냥 해주고 싶었다.

메로나 하나를 골라서 나오던 다정이는
내게 메로나를 척 쥐어주더니 지하철은 음식물 반입 금지라며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뜬금없는 투철한 준법정신에 나는 폭소를 터뜨릴 뻔 했지만 간신히 참고
둘이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나는 메로나를 까서 다정이에게 건냈는데
얘가 되려 나한테 한 입 먹으라고 내민다.
거절하기도 뭣해서 약 손가락 반마디 만큼 베어물었는데

오, 어, 엉?

다정이가 내 얼굴, 정확히 말하자면 내 입술로
매우 빠른 것 같으면서도 천천히, 우악스러운 듯 하면서도 은근하게 접근해 왔다.
입술이란 문으로 닫혀 있던 서로의 구강이 경계를 허물면서
두 사람에게 처음으로 공유된 공간이 생긴 듯 했다.
당연히 메로나는 빠르게 녹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우리는 키스를 하며 메로나 하나를 나누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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