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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만화

며칠 전..
빌린 도서가 연체되어 학교에 반납하러 가야 했다.
대략 12시가 좀 넘은 시각 지하철에 탔는데 사람이 매우 북적댔다
몇 개의 역을 지나고 나서야 사람이 확 빠지고 열차 안이 한산해졌다.
‘이제 사람이 다 빠졌네’하고 왼쪽 끝을 쳐다보니
나처럼 학교에 가는 듯한 사람이 1명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의.. 검정색 큰 가방은.. 내가 아는 사람이 가진것과 똑같은 가방인데 혹시..
그렇다고 그년이라고 착각하는 멍청한 실수는 더 이상 안해.. 쳐다보면 딴사람일거면서..

.....문제의 그년은 지난학기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눈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나는 유능한 솔로의 경력을 살려 나는 그년에게 접근하는 행동을 자제한채 학기내내 조용히 지냈다.
애초에 ㅅㅌㅊ였지만 혼자 지켜볼수록 그년에 대한 미화는 끝이 없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맞은 후 나는 그년에게 말 한마디 못 걸어본 사실에 괴로워했다.
외롭기 짝이 없는 방학..그후 1개월동안 힘겨운 과정 끝에 마음속에 폭동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년을 못 잊었나? 늘 이런식으로 나 자신을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앞에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
어?? 아무리 봐도 이번엔 맞는거 같았다. 반사된 형상에서 눈을 떼고 실물을 다시 쳐다봤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맞아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니가 왜 갑자기 여기 이순간에 나타난거지??

..하였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바로 가서 인사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김운지 교수님 중력학I 들으셨죠? (네..)
하고 뒤이어 건넨 말이 ‘예비 수강신청 하셨어요?’
상대방의 관심사도 아예 모르는 상태지만 나의 관심사를 무슨 수강신청에 다 있는마냥 던지는 질문 같았다.
안 했다고 하면서 교환학생 얘길 하였다. 뭔 소린지 되물으니, 이제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간다고 하던거였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름은 김효민이라 하였다. 나이도 물었다. 22세.
물어본것도 아니지만...전 김ㅇㅇ이에요.. 27살이고요..
말해줬는데(보기보다...) 라고 반응했다. 얼굴이 어리다는 것인지.. 그냥 키가 작아서 그래보인단 건지?
어디 살고 있느냐? (기숙사요) 그러면 집은 어디냐고 하니 포항에 있다고 했다.
지난번에 포항에 여행간 적이 있다고 하며 호미곶, 구룡포 얘기와함께 부산-울산-포항을 다녀온 얘길 했다.
무심코 혼자서 다녀왔단 소릴 내가 했었는지 (왜 혼자서..?) 라고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몰라서 묻나? 이나이 쳐먹도록 여행 다닐 친구가 없어서지.
하는 이유를 간신히 회피하고 ‘생각도 정리할겸..’하는 말로 땜질했다.

이 시점이었다.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저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어요? 여자는 안절부절 못하며 말을 않다가
‘곧 교환학생 떠날거라서 휴대폰을 없앴다’고 답했다.
그걸로 시비를 걸 마음은 먹지 않았다..

쉴새없이 질문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디 갔다오는 길이냐? (학원에) 토익 공부? (중국어)...
도중 학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내리기 위해 일어났다. 그순간 열차가 멈추는 바람에 휘청 앞으로 쏠렸다.
..씨발 초라하다고 스스로 여기면 ㅈ되는거야.. 하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써 행동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를 조금 넘은 상태였다.
밥 먹을 시간인데 점심 같이 먹지 않겠냐 얘길 꺼냈다.
(이미 먹었다)고 하자 갑자기 야갤에서 본 글이 생각났다

[여자한테 밥먹자고 하면 다 밥먹었다 그러더라
 너네도 그러냐?]

‘부지런하시네요’ 하고 말해주니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게 보였다.

'그러면 이렇게 만난것도 우연인데 커피라도 같이 마시죠' 라고 한 장의 카드를 더 빼들었더니
(배불러서요..피곤하기도 하고요)라 대답을 했다.
당황하며 말하는게 드러나 보였다. ㅋㅋㅋㅋㅋㅋ내가 엑윽엑엑을 시켰노ㅋㅋㅋㅋㅋㅋ

남자친구가 있느냐 물었다. (있다) 면서 이제 700일 되었다 했다.
그 ㅈㅈ새낀 같은과라며 올해 4학년이라 했다.
방금 연락처 물을때 말해줘야 할거 아니였노? 왜 그걸 이제 얘기하노 이기라..

유학이니, 학점이니 같은 얘길 하며 걷다보니
내가 갈 방향의 길이 나와 가야 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전 이쪽으로..’ 하고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다시 혼자 걸어가며 가졌던 대화를 생각해보니 내가 그순간을 대처한게 놀라울 정도였다.
ㅈ나게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떨지 않은 채로 말하고 내가 무슨 얘길 했는지도 의식할 수 있었다.
어째서 가능했을까? '무식하면 용감하다' 같은 속담도 떠올랐다.
그년은 이미 마음을 정리한 대상이란 관점에서 상대하였다. 게다가 가능성이 없는 게임임을 잘 알고 있었기도 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양손을 두 주머니에 찔러넣고 아주 편하게 걷고 있다가 앞을 쳐다보는데 호옹이??
저 멀리서 그년이 또 걸어오고 있는게 아닌가??

이젠 다시 안 볼 것 같았던 사람을 저녁에 또다시 본다는 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곧 유학 떠나는 남자친구 있는 년에 지나지 않으니 더 이상 나의 인간관계가 아니지..하며 못 본척 하고 지나갔다. 내가 신은 신발, 옷, 잠바... 쓰고있는 안경..164의 키.. 그러한 형상의 집결체를 노출시키기도 싫었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지나쳤기에 그녀는 날 봤다. 조용히 지나갔다.
서로가 다른 곳을 애써 쳐다보며 앞으로 걸은 것 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어디 갔다 오세요?’ 하는 인사를 해야 했을까? 인사 안 한걸로 안타까워 해야 하나? 돌아가는 지하철의 문이 닫히기 전 스쳐간 후회였다.
전혀 그렇지 않다. 2월말에 외국으로 떠나고 남자친구도 이미 있다는 사람은 내 관심사에서 삭제시킬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저 인간과 나는 그냥 남남에 지나지 않다는 최종결론을 얻는 데는 오늘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학 후 1개월씩이나 괴롭게 보내지 않고 좀 일찍 결론을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보같이 보낸 1월을 깊이 애도하였다.

오랜 조사 끝에 수사종결 처리를 한 감식반의 주인공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상대와 인연이 없다는걸 검증했고 쿨하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난 깨끗이 물러나는 승부정신을 보였다. 
그후 며칠간 이 기억과 함께 잠을 깼다. 원치 않았지만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걸 발견했다.
속이 상한건 어쩔수가 없다. 이년이 남자친구 있단 얘길 할때 지어낸거 같아 보였는데? 
그런데 이를 무작정 부정하고 거부하려는 마음가짐은 고통을 더 불러 일으킨다. 그냥 이것마저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 같다. 마치 내가 어제 산 물건인마냥 조심히 꺼내보고 마음속 한 구석에 얌전히 모셔놓아야 할 것이다.

새벽감성에 쓸데없는 얘기가 많이 섞였는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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